rimy random

Fri, October 23. 2009

기여운 녀석! ^^


  우리 아지트;;

우리 아지트;;

Wed, October 14. 2009


  1년 전에 미화와 함께 찾았던 해운대.. 올해는 지영이도 함께. 
  풍선도 그대로!

1년 전에 미화와 함께 찾았던 해운대.. 올해는 지영이도 함께. 풍선도 그대로!

Sat, October 10. 2009

Thu, October 1. 2009

빅뱅이론과 멘탈리스트, 덱스터, 가십걸의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흐흐흐 선덕이랑 아부해까지 한 주가 즐겁습니다! (너무 많은지도 ㅡㅡ;;)

Thu, September 24. 2009

Wed, September 23. 2009

누군가에게 과거를 떠올려보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총을 겨눈 채 재채기를 하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순수한 의지에서 나오는 진정한 기억이 아니다.. 과거 속 기억과의 진정한 충돌은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과거 속 장면이 우리 앞에 느닷없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속의 기억이 아니라 시간의 바깥에 있는 어떤 주머니 속에서 막 꺼낸 것 같은 시간이다. 진정한 기억은 자신과 현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녹여버린다. 서른 살이 돼 그 숲에 있으면 문득 분홍색 햄이 가득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캠핑 나온 열두 살짜리 꼬마로 돌아간다. 기억이란 누군가의 질문에 의해 억지로 끌어올려지는게 아니다. 어느 기차역 카페에서 풍겨오는 샌드위치 냄새를 맡고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오래전으로 돌아가는 우연한 조우 같은 것이다. ‘그래요,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건 프루스트적인 시간 같은 것이죠.’ 이사벨의 친구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나는 프루스트에 겨우 발끝만 살짝 담갔을 뿐이지만 나중에 그에 대한 통찰력이 넘치는 새뮤얼 베케트의 책은 꼼꼼히 읽어보았다. 소파 위에 있던 이사벨이 과거를 떠올리려 애쓰지도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것은 프루스트적인 시간을 체험한 것이었다. 기억에 관한 프루스트의 사상은 풍부하긴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의 검토 수단으로 삼기에는 매우 복잡하다.. 기억은 스스로 단계를 밟아나가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불친절하게 불쑥 튀어나오고, 어떤 우연한 주제를 여는 서막일 뿐이다.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며 튀겨지는 요리가 아니라 다시 데운 음식이다. 또 다른 면에서, 누군가 물어보지 않는 상태에서의 수동적인 기억 속에서 인간은 현재의 무작위적인 조각들에 의해, 잘 알려진 마들렌 과자에 의해,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쿠션의 느낌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모든 감각을 통해 존재하고, 현재처럼 생생한 과거의 손아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이런 조명의 순간이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그저 일부 속에서 방황하며 잃어버린 세계를 되살려낼 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대기적 순서에 따르지 않고 프루스트적인 시간을 이용해 탐험적으로 과거를 구성해보면 어떨까. 냄새, 감촉, 소리 그리고 삶의 결정들을 봄으로써 촉발되는 그런 기억들로 과거를 정렬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연대기와 비교해보면 아주 복잡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니체의 연대기) 이렇게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한 것은 시간의 선형적 관계에 대한 생각, 특정 기억들이 시간상으로 다른 기억들보다 훨씬 이전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프루스트적인 시간으로 보면 어떤 사건들을 서로 구분하고 있는 그러한 거리가 단지 두 사건 사이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억이 현실만큼이나 강력하게 떠오른다면 과거의 삶과 현실의 삶은 순차적이 아니라 나란히 전개되는 것이고, 우리는 두 측면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프루스트적인 시간,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127-134
내 자신에 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왜 모든 것을 당신에게 명쾌하게 설명해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왜 사람들의 삶을 그런 바보 같은 전기들처럼 요약해야 하는지 말야. 내 안에는 나조차도 납득하기 어려운 괴상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야. — 이사벨의 변,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328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우리가 알고 싶은 사실들은 이미 정점에 달한다.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으며 우리는 가족과, 동료, 일, 어린 시절, 삶의 철학 그리고 그들의 로맨스에 관해 탐구한다. 그러나 일단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반갑지 않은 단계를 맞는다. 친밀해졌다고 해서 좀더 심오한 주제에 관해 긴 대화를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상반된 시나리오를 펼치기 일쑤다… 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는 역설을.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사과를 다 먹어치울만한 시간에서 수도꼭지가 다 말라버릴만한 시간까지로 무한정 확장한다고 해서 훌륭한 대화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 서로에 관한 궁금증이 더 이상 급격하게 솟아나지 않는 것은 삶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앎이란 그것을 어느 정도 소유했는지를 암시한다. 타인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요구를 외면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아이러니 이론에 대한 그들의 관점처럼 쉽게 다루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모두 외면당한다. 더욱이 누군가를 더 오래 알수록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자책감도 늘어난다. 주어진 시간 내에 그들의 강아지나 아이, 아버지 이름이나 직업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제 맥락 안에서는 그들에게 이질성을 드러내 보이는 장치가 돼버린다. —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326-327
분명히, 전기를 멈춰야 할 적절한 시점이 있다… 어떤 것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 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면,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누군가를 충분히 잘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상징이 아닐까? —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314

Sat, September 19.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