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관계의 핵심은 내 말과 내 인생을 감시하는 그의 방식에 있다. 그는 둘 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 그 결과 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은 꺼지지 않는다.
— 앤 패디먼

우리 관계의 핵심은 내 말과 내 인생을 감시하는 그의 방식에 있다. 그는 둘 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 그 결과 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은 꺼지지 않는다.
— 앤 패디먼
미에 대한 판단은 예술작품과 상호작용하는 사이에 벌써 전해집니다. 저는 미에 대한 판단을 비평의 정점이라기보다는 미의 근원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 잘 알려고,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우리의 삶의 일부분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취미에 대한 판단, 즉 ‘이것은 아름답다’라고 언명하는 것은 예술작품을 해석하고 난 뒤에 이르게 되는 결론이 아닙니다. 스탕달이 말했고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실제로 인용하는 구절인데, ‘미’라는 것은 ‘행복에 대한 기대’입니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이전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의심해보고, 추측해보고, 감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보거나 읽거나 들을 때, 또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노출될 때 우리는 그 사물에 대해 알려고 한 것보다 더한 무엇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여지껏 알지 못하는 어떤 방식으로 가치있는 것이라는 점을 모호하게나마 감지합니다. 취미판단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지, 지나간 일에 대한 회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측이고 가설입니다. 그것이 가설이라면 증거를 넘어선 것이고, 그것이 증거 너머의 것이라면 우리가 이미 인식하고 있는 대상의 특성에서 나오는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직까지 철저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는 한 계속해서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알렉산더 네하마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p.121-122
내가 그것들을 더욱 자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항상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감탄과 경외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나의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나의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 칸트, 실천 이성 비판 (via 애링턴)
내 삶에 나의 하루에 누군가 끼어들어주길 바라는 순간이 있다. 첫 눈이 내린다는 뜬금없는 문자 같은 것 말이다. 먼저 손 내밀기는 어려워하면서도 그리 바라는 것은 많다.
Maybe the happy ending is… just… moving on.
— He’s Just Not That Into You
누군가에게 과거를 떠올려보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총을 겨눈 채 재채기를 하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순수한 의지에서 나오는 진정한 기억이 아니다.. 과거 속 기억과의 진정한 충돌은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과거 속 장면이 우리 앞에 느닷없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속의 기억이 아니라 시간의 바깥에 있는 어떤 주머니 속에서 막 꺼낸 것 같은 시간이다. 진정한 기억은 자신과 현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녹여버린다. 서른 살이 돼 그 숲에 있으면 문득 분홍색 햄이 가득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캠핑 나온 열두 살짜리 꼬마로 돌아간다. 기억이란 누군가의 질문에 의해 억지로 끌어올려지는게 아니다. 어느 기차역 카페에서 풍겨오는 샌드위치 냄새를 맡고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오래전으로 돌아가는 우연한 조우 같은 것이다. ‘그래요,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건 프루스트적인 시간 같은 것이죠.’ 이사벨의 친구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나는 프루스트에 겨우 발끝만 살짝 담갔을 뿐이지만 나중에 그에 대한 통찰력이 넘치는 새뮤얼 베케트의 책은 꼼꼼히 읽어보았다. 소파 위에 있던 이사벨이 과거를 떠올리려 애쓰지도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것은 프루스트적인 시간을 체험한 것이었다. 기억에 관한 프루스트의 사상은 풍부하긴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의 검토 수단으로 삼기에는 매우 복잡하다.. 기억은 스스로 단계를 밟아나가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불친절하게 불쑥 튀어나오고, 어떤 우연한 주제를 여는 서막일 뿐이다.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며 튀겨지는 요리가 아니라 다시 데운 음식이다. 또 다른 면에서, 누군가 물어보지 않는 상태에서의 수동적인 기억 속에서 인간은 현재의 무작위적인 조각들에 의해, 잘 알려진 마들렌 과자에 의해,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쿠션의 느낌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모든 감각을 통해 존재하고, 현재처럼 생생한 과거의 손아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이런 조명의 순간이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그저 일부 속에서 방황하며 잃어버린 세계를 되살려낼 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대기적 순서에 따르지 않고 프루스트적인 시간을 이용해 탐험적으로 과거를 구성해보면 어떨까. 냄새, 감촉, 소리 그리고 삶의 결정들을 봄으로써 촉발되는 그런 기억들로 과거를 정렬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연대기와 비교해보면 아주 복잡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니체의 연대기) 이렇게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한 것은 시간의 선형적 관계에 대한 생각, 특정 기억들이 시간상으로 다른 기억들보다 훨씬 이전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프루스트적인 시간으로 보면 어떤 사건들을 서로 구분하고 있는 그러한 거리가 단지 두 사건 사이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억이 현실만큼이나 강력하게 떠오른다면 과거의 삶과 현실의 삶은 순차적이 아니라 나란히 전개되는 것이고, 우리는 두 측면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프루스트적인 시간,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127-134
내 자신에 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왜 모든 것을 당신에게 명쾌하게 설명해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왜 사람들의 삶을 그런 바보 같은 전기들처럼 요약해야 하는지 말야. 내 안에는 나조차도 납득하기 어려운 괴상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야.
— 이사벨의 변,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328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우리가 알고 싶은 사실들은 이미 정점에 달한다.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으며 우리는 가족과, 동료, 일, 어린 시절, 삶의 철학 그리고 그들의 로맨스에 관해 탐구한다. 그러나 일단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반갑지 않은 단계를 맞는다. 친밀해졌다고 해서 좀더 심오한 주제에 관해 긴 대화를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상반된 시나리오를 펼치기 일쑤다… 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는 역설을.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사과를 다 먹어치울만한 시간에서 수도꼭지가 다 말라버릴만한 시간까지로 무한정 확장한다고 해서 훌륭한 대화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 서로에 관한 궁금증이 더 이상 급격하게 솟아나지 않는 것은 삶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앎이란 그것을 어느 정도 소유했는지를 암시한다. 타인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요구를 외면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아이러니 이론에 대한 그들의 관점처럼 쉽게 다루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모두 외면당한다. 더욱이 누군가를 더 오래 알수록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자책감도 늘어난다. 주어진 시간 내에 그들의 강아지나 아이, 아버지 이름이나 직업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제 맥락 안에서는 그들에게 이질성을 드러내 보이는 장치가 돼버린다.
—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326-327
분명히, 전기를 멈춰야 할 적절한 시점이 있다… 어떤 것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 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면,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누군가를 충분히 잘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상징이 아닐까?
— 알랭 드 보통, Kiss & Tell, p.314
알프스와 바다가 우리를 갈라 놓을 때 가끔 나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그대가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렇게 갈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바이런이 마르체사 지치올리에게
090727, 11:21 pm. 오늘은 책에 빠져있느라.. 이런 글을 존 러스킨은 1860년에 썼다니 놀랍지 않나요.
photo. peveryday. book. quote. Reblogged from peveryday 4 notes. 3 years ago
단테는 이것에 뛰어난 자들을 하늘에서 영원히 독수리 눈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별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는 어둠과 빛을 구별할 줄 알았고, 모든 인류에게 신체의 등불인 눈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날개에 치유하는 능력을 갖추고” 정의에 힘과 지배권을 주는) 독수리의 날개를 이룬 영혼들은 푸른 하늘에 빛으로 이런 글을 새긴다. “DILIGITE JUSTITIAM QUI JUDICATIS TERRAM” 즉, “대지의 심판자여, 정의에 (그냥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다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추구하는 사랑인 것이다. 지상에서 심판을 내리거나 또는 그 판결을 집행하는 것은 재판관에게만 요구되는 일도 아니고 통치자에게만 요구되는 일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능력과 지위에 따라 심판하고 집행해야 한다…
절대적인 정의는 절대적인 진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이 거짓된 사람과 구별되는 소이는 그의 진실에 대한 욕구와 희망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과 구별되는 소이도 그의 정의에 대한 욕구와 희망에 있다. 그리고 절대적인 정의는 얻기 어렵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정의라면,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는 힘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것을 요구했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p.257